때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인 1891년, 당시 러시아의 황태자였던
니콜라이가 일본을 방문하였습니다. 참고로 이 니콜라이 황태자는 나중에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되는 사람입니다.
세계 최대 제국의 황태자의 방문을 일본은 가히 거국적으로 환대했습니다. 당시 이 스물세 살의 젊은 황태자는 일본에서의 환대에 크게 만족했고 나름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일본 순방 일정을 마치는 듯했습니다만..
일본 방문 중의 어느 날, 시가현(滋賀縣)의
오쓰(大津)라는 곳의 대로를 황태자 일행이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행렬에 주변의 환영인파는 마치 천황이 거리를 지나가는 것처럼 모두 고개를 숙이고 경비하는 순사들은 거수경례로 예를 표하고 있던 그 때,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황태자의 주변을 경비하던 순사 하나가 허리에 찬 사벨을 빼어 들고 황태자를 습격한 것이지요.
자신을 경비하던 순사의 돌연한 습격으로 생명의 위기에 처한 니콜라이 황태자였고 실제로 칼에 뒷머리를 베여 피를 흘릴 정도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다행히 그 이상의 부상은 당하지 않고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천만다행으로 황태자의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이 사건 - 오쓰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오쓰 사건'으로도 불립니다.- 일본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온 일본의 국민들은 이 사건에 놀라 황태자가 입원한 병원으로 수많은 위문품과 위문전보를 보내지요. 일본 천황도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바로 기차를 타고 몸소 황태자의 문병을 오는 등 일본의 조야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난리가 납니다. 심지어 쿄토부에서는 하타케야마 유코라는 한 여인이 이 사건에 사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할 정도였으니 가히 공황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황태자 자신이 오히려 이런 일본인들의 반응에 사의를 표할 정도였다니 말이지요. 어쨌든 일본에서의 나머지 일정은 취소되고 황태자는 코베에서 군함을 타고 러시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나저나 이제 남은 것은 니콜라이 황태자를 습격한 범인인
쓰다 산조(津田三藏)를 어떻게 처리 하느냐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의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고 이 문제를 잘못 처리해서 만약 러시아와 전쟁이라도 하게 되면 일본의 앞날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범인의 처리에 일본과 러시아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일본의 조야는 범인의 무조건적인 사형을 주장했고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동을 건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대심원장
코지마 코레카타(兒島惟謙)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코지마는 무조건 사형을 촉구하는 사람들에게 법률을 들어
'외국의 황족이 상해를 당했을 때에는 일반인의 상해사건으로 취급하여 무기징역이 한도'로
그 이상의 형량을 부여하는 것은 위법으로 사형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일본은 바로 얼마 전에 헌법을 제정한 상태로 코지마는 이제 막 도입한 헌법을 어기는 것은 헌정시스템 자체를 파괴하는 나쁜 선례로 작용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또한 실제로 그 전에 외국에서 비슷한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종신형으로 처리한 전례가 있었다는 것을 들어 반대를 한 것이지요.
그러나 사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압력도 대단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전쟁이 나서 나라가 망하고 나면 법률이 무슨 소용이냐?'라는 것이었지요.
근대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좋다. 나라가 멸망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형법 116조(일본의 황족을 위해했을 경우에 사형)을 확대 적용하여 무조건 사형을 처하라는 압력을 사법부에 가했습니다. 이에 코지마는 다음과 같이 응수 합니다.
"법률을 왜곡해 버리면 오히려 러시아를 비롯한 모든 외국으로 부터 경멸을 받게 되고, 앞으로 100년은 두고두고 국가에 해를 남기게 될 겁니다. "
" 러시아와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는 정부의 조치에 달렸습니다.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제가 선두에 서서 사법계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도록 하지요."
결국 정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사법부는 당시의 법률에 의거한 판단으로 쓰다를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의 판결을 내립니다.
일본 사법부가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국의 법률에 의거해서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린 것을 목도한 세계 각국은 그 판단에 납득하는 표정을 보였으며 러시아조차도 그 뒤로 다른 압력을 가하지 않고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최소한 영토할양이나 배상금, 최악의 경우에는 러시아의 전면전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던 일본으로써는 천만다행인 결과가 되었지요. 이러한 법률에 의거한 판결은 일본의 헌정시스템에 대한 국외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었으며 이것은 그 뒤 외국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있어서도 의미있는 사례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일본 헌정을 지켜낸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이야기에서의 어떤 사람들 처럼 당장의 편의나 목적을 위해서
시스템을 만든 사람 자신들이 그 시스템을 무시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는 100년이 넘은 옛 이야기입니다만 요즘의 우리에게도 시사 하는 바가 큰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늘..처음의 설레임을 간직하는 내가 되길...Mizar